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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진체 (眞體)를 보자대부분 겪는 사춘기는 혈기가 왕성하다.내 사춘기는 희망사항도 많았지만, 두려움도 많았다.내 미래는 어떻게 될까? 앞으로 무얼해야 하지?이렇게 살면 내가 바라는 바를 성취할 수 있을까? 그전에, 내가 바라는 바는 무얼까? 두려움, 참 나를 많이 괴롭혀 왔다.두려움은 불안함으로 발전하고, 나는 불안감에 스트레스에 시달리기도 했다. (물론 아직도 그러고 있음)두려움은 그 이면에 그걸 하고 싶다 라는 욕망을 품고 있다.무언가를 하고 싶은데, 그 무언가가 이루어 질까라는 두려움. 두려움은 자기 자신을 단련시키기도 한다. 준비를 시키기도 하고,두려움이 지나쳐 불안하게 만들고, 불안감에 빠져 정신적인 도피를 하기도 하고, 급기야 포기하게도 한다. 하지만 그 속에 숨은 것은 하고자 하는 욕망이다..
시골 어느 길가에 굴러다니는 돌맹이일지라도,나보다는 긴 역사를 가졌다. 여행을 갔을 때 보이는 풍경이 품은 역사도 나를 우습게 여길 정도로 긴 역사를 지녔다. 내가 앉아 자판을 두드리고 있지만, 자판에 포함된 플라스틱,플라스틱을 만든 석유, 썩어서 석유가 된 과거의 그 무엇을 생각한다면,나는 정말 작은 역사를 지녔다. 주위를 둘러봐도 나보다 짧은 역사를 지닌 것들은 내가 키우는 화분,내 자식들.내가 먹는 음식. 참 가볍다..나는 참 가벼운 역사를 지녔다.
무었을 하던, 여유가 있어야 제대로 된 생각을 할 수 있고, 제대로 일 처리를 할 수 있다고 보는데, 여유를 가지기 위해서는, 무었을 하던 시간을 가지고 해야지 급박하게 하면 안된다고 생각합니다. 근데, 시간을 가지고 여유롭게 하기 위해서는 현재 하는 일에 대하여 잘 모르면, 그 시간은 굉장히 짧게 느껴질 겁니다. 그러면, 여유가 없어지죠.. 많이 알고, 그리고 잘 느끼고, 정보를 모으고 해야 합니다. 집중! 하면 여유가 생길 거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P.S. 이런 생각 뒤에는 참 아이러니 하다고 봅니다. 여유를 갖자고 생각했는데, 집중해서 열심히 일하는게 결론이라니~!!!
오랜만에 글을 남기네.. 내 속에서 글이 넘쳐서 담을 데가 없을 때 쓰려고 햇는데,, 까먹지 않을려고 쓰네 다들 아는 얘기가 뼈저리게 느껴져서, 글로 다시 남기는 글.. 가버린 세월 돌아오지 않는다... 내가 써버린 시간은 쓴것이고, 어떻게 되었든 돌아오지 않는다...
- 나를 어떻게 보는지 상상하고, 그것을 믿지 말자!- 느끼는 것은 좋다. 모든 감각기관으로 느끼고, 남의 감정도 느끼자. 그리고 이해하자. 하지만 , 나를 어떻게 느끼는지 상상하지 말자. 없는 사실을 상상하지 말자
마음이 생하는 까닭에 여러 가지 법이 생기고 마음이 멸하면 감(龕)과 분(墳)이 다르지 않네 삼계가 오직 마음이요, 모든 현상이 또한 식(識)에 기초한다. 마음밖에 아무 것도 없는데 무엇을 따로 구하랴! 심생즉 종종법생(心生則 種種法生) 심멸즉 감분불이(心滅則 龕墳不二) 삼계유심 만법유식(三界唯心 萬法唯識) 심외무법 호용별구(心外無法 胡用別求)------------------------------------------------------------------ 옛날에 원효대사가 해골물 사건을 겪으며, 남긴 말이다.난 이 말을 예전에 읽었고, 이해하지 못했다. 하지만, 현재는 어렴풋이 몇가지만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내가 어떤 대상에 대하여 공감하고, 같이 아파하고, 미추를 느낄 수 있는 것은 그 대..
나의 세대에서 고등학교 윤리 시간에 "악법도 법이다" 라는 말을 소크라테스가 했고, 이런 준법정신으로 소크라테스가 판결을 받아들였다고 배웠다. 그리고, 나에게도 법을 지켜오는데 있어, 소크라테스의 사례가 어느 정도 영향을 미쳐왔다고 본다. 하지만 이는 잘못되었다. 소크라테스는 이런 말을 하지 않았다. 또한, 악법도 지켜야 한다는 것이 아니라, 소크라테스는 제도 그 자체를 존중하고 보호할려고 했었던 것이다. 소크라테스는 잘못된 평결에 대하여 적극적으로 반박하였고, 충분히 반박할 기회도 가졌다.하지만, 평결을 뒤집을 수는 없었다. 사형을 피하고자 도망친다면, 자신에게 불리한 평결을 한 이들에게 정당성을 줄 수 있기에 도망치지 않고 사형을 받앗던 것이다. 또한, 소크라테스는 죽음을 두려워 하지 않았다. 철학자..
항상 고민해 왓다. 어떻게 살아야 할지? 무엇을 해야 할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는 도가에서 얘기하는 道와 닿아 있는 듯 하다. 道, 즉 길은 너무 많다. 내가 어떻게 살아야 할지는 알기가 어렵다. 너무 길이 많기 때문이다.이렇게도 살아도 좋고, 저렇게 살아도 좋다. 사는 길이 정해져 있지 않기 때문이다. 물론, 그 사람이 타고난 자질이 있고, 물려받은 집안 환경 등 여러가지 주어진 것들이 많다.하지만, 대부분 비슷한 환경하의 형제 또는 쌍둥이도 살아가는 길이 다르다. 이렇듯 주어진 환경, 천부의 자질이 있으메도 그 길은 많고 무한하다. 즉 없다.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는 정해진 바 없다. 길이 없기 때문에, 당신이 걸어가는 그 길이 바로 道 이다. 당신이 걸어가는 그 길은 바로 도이다. 이것이 내가 ..
지극히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다른 분들께서 말씀하셧던 부분과 어느 정도 맥이 닿아 있다고 생각한다.삶이 있고, 죽음은 살았기 때문에 죽는다.죽은 것들이 있기에, 다시 삶이 생겨나고, 삶을 산 후 죽는다.삶과 죽음은 각각이 별개가 아니라, 하나이다.하나의 삶과 죽음이 완전히 끝나면, 또 다른 삶과 죽음이 태어난다. 또 다른 하나에게 다시 밑거름이 되도록 노력하자.
삶과 죽음이 하나라는 고인의 사생관 자체는 불교의 생사일여(生死一如) 사상과 맥을 같이 하면서 보다 넒은 의미에서 삶에 대한 존재론적 화두를 던진다. 불교 조계종단의 대표적 경학자로 꼽히는 원철 스님(조계종 재정국장)에게 생사일여의 뜻을 물었다. - '삶과 죽음이 하나' 또는 '생사일여'라는 인식의 불교적 의미는 무엇입니까. "불교 존재론의 핵심인 연기론(緣起論)에 바탕을 두고 있는 얘깁니다. 세상의 모든 현상(法ㆍ법)은 이치에 따라 생멸, 이합집산하면서 변화하기 때문에 삶과 죽음도 그런 궁극적인 흐름 속에서는 따로 구분할 수 없는 연속선상에 있다고 봅니다. 본질적으로 현상을 있는 것도 아니지만(非有), 그렇다고 없는 것도 아닌 것(非無), 즉 비유비무(非有非無)로 인식한다는 것입니다." - 생사일여라는..